1. 동네슈퍼 / 밤 나름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듯 하지만 여전히 허름한 동네슈퍼 앞, 편의점에나 있을 법한 파라솔 있는 테이블이 2개 놓여 있다. 테이블에 앉아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유정. 퇴근하는 자동차나 집에 돌아가는 고등학생들이 간간히 지나간다. 유정은 한 번 씩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일상의 풍경을 감상하는 듯 보인다. 자리를 정리하고 장을 ...
“할 말이 있어.” 우림이 공간을 깨고 들어오자 그제야 다솜과 시환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림은 두 사람 앞에 자리도 잡지 않고 문 앞에 선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폭풍을 헤치고 온 듯 우림의 작은 몸은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과 목소리는 목표를 향해 단호하게 뻗어나가는 장수처럼 강렬했다. “내가 당신 혈액을 가지고 환생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솜은 시환의 임시거처 문 앞에 서 있다. 막무가내로 우신을 앞세워 이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제 뒤돌아 나갈 길은 막혀 있다. 다솜이 가야 할 길은 앞에 서 있는 문을 열고 나아가는 것뿐이다. 문 앞에 선 다솜은 생각했다. ‘시환은 그날 밤 문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 이 문만 열면 그 안에 시환이 있지만 선뜻 문고리를 돌릴 수 없는 자...
우림과의 동거는 성과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인내심이 바닥난 우신이 들이닥친 날에도 우림과 다솜은 지난 여러 날과 다름없는 탐색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놀러 왔어?” “건질게 없는 게 내 탓이야? 그냥 저 여자 불쌍한 인생에 시환이 그나마 등불이었어. 매일 결론은 그딴 로맨스로 귀결이라고.” “됐어. 여기서 답을 찾는 건 아닌...
우신을 따라 뒤쫓아 온 유지는 대문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이것은 두 사람만의 일이다. 다정이 그 옛날 석산을 바라보고 석산이 다정을 바라보는 시간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 내가 뒤에 서 있을 시간이다.’ 유지는 온 힘을 다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서 있었다. 나아가지도 주저앉지도 못하게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우신이...
환생체인 유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가족을 만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최면술사들은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환생체가 되었다. 주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자식들이 최면술사가 되었는데, 유지의 부모는 범죄자는 아니었다. 큰 전쟁으로 일족의 대부분을 잃었던 때, 연고지가 없는 고아들을 끌어들여 일족의 사람으로 키우고 수를 늘리기 위해 그들과 결혼을 시켰다....
그것은 연둣빛 새싹이 올라오는 봄날의 일이었다. 따뜻해진 공기와는 달리 일족의 눈빛에는 여전히 일족이 아닌 환생체를 바라보는 칼 바람이 스며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이 이뤄 논 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도 싫고 새 삶을 살겠다며 의욕적으로 구는 것도 싫었다. 그 수가 하나 둘 늘어나는 것도 싫었고 그런 그들을 신경 쓴다는 것도 싫었다. 일족이 배타적으로 굴수록 일...
우신이 돌아가고 난 집 안에 무료한 표정으로 잠자리를 찾는 우림과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눈빛을 하고 우림을 바라보는 다솜이 남겨져 있다. 우림은 다솜의 방 안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들고 건넌방에 자리를 펴며 말했다. “이불 좀 쓸게.” 그리고는 물을 닫고 불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다솜은 환생체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여자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은 모든 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겠다는 석산의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오른 의문이었다. 우석은 이제 세상에 남은 하나뿐인 우림의 가족이자 친구였다. 큰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우림은 가족들의 소식을 일부러 멀리했다.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으나 알 필요가 없었다. 이제 가족 안에 우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세...
다정이 마을에 오고 석산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석산은 다정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근처에 다정이 있다는 것은 이미 다정은 이 일족의 손아귀 안에 들어온 것이고 이 비밀스러운 일족 안에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것이 확실했다. 풀려난 석산은 다정을 데리고 이곳을 나갈 생각뿐이었다. 석산은 느...
눈을 뜬 다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우석이 다정을 마취시킨 채 일족의 마을로 데려왔기 때문에 다정의 입장에서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신이 엄한 곳에서 눈을 뜬 셈이었다. 급하게 두리번거리던 다정의 눈에 우석이 보였다. “당...신?” “놀라지 마세요. 제가 기억나시나요? 여긴 저희 집입니다. 석산이가 있는 곳이기도 하죠.” 석산의 이름을...
우석은 석산을 데리고 본가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몇 달간 우석은 석산의 말을 찾아주려 노력했고 더디지만 조금씩 언어를 찾아갔다. 석산이 어느 정도 언어를 되찾게 되었을 때 우석은 석산에게 가장 묻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정말 네가 스승을 죽였느냐.” “아니요.” “정말 죽이지 않았느냐.”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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